보리암

역사

보리암의 창건주 원효대사

원효스님은 삼국간의 전쟁과 통일의 격변기였던 7세기에 살았으나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으며, 1백여부 2백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요 대학자였다.
스님의 성은 설씨로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 현재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 불지촌(押粱郡 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요 담내(談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송(宋) 고승전」의 기록에 의해서 15세쯤 출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간직하고 있던 스님은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으나 학문범위는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유가서(懦家書)와 도가서(道家書)에도 상당히 밝았음을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혜공과 대안 두 스님으로부터는 무애행을 통한 대중교화와 거리의 교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스님은 진리의 벗,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45세(661년)때 다시 시도했으나 남양만이 멀지 않은 적산의 한 무덤 속에서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라고 깨달은 후 의상스님을 뒤로 한 채 돌아와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대중들로부터 왕실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스님의 일생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신혈사(神穴寺)에서 입적(入寂)하셨다.